정신적으로 온전하다는 것은 어떤 상태여야 가능한 이야기일까.
갈수록 인식이 개선되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지금도 친하지 않은 사람들 앞에서
본인이 신경정신과나 정신건강의학과에 내원한다는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기란 쉽지 않다.
간혹 그런 사실을 조금 '있어보인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 수는 있겠다(조심스러운 얘기지만).
이십년 전을 생각해보면 '용인정신병원', '하얀 집' 과 같이
정신병원을 대표하는 용어는 굉장히 공포스럽고 괴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지금도 '곤지암' 같은 영화에서 정신병원은 공포 서사의 배경이 되기는 하지만,
지금은 '정신건강의학과'라는 예쁜 말이 통용되는 덕분인지 '정신병원' --> '정신병자', '정신병동' --> 공포의 대상
과 같은 사고의 흐름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 같다.
어쨌거나 가면 갈수록 정신이 늘 건강한 상태로 살기에는 벅찬 세상이라,
시간적 여유가 허락한다면, 고통스럽게 흐르는 시간과 혼자서 싸우기보다는
정신건강의학과에 가서 도움을 받는 편이 나을 때도 있다.
나는 꽤 오랜 기간에 걸쳐 간헐적으로 신경정신과 진료를 받았다.
운이 좋았다고 봐야 하나, 어릴 적 부모님의 지인 중에 정신과 원장님이 계셨기에
작은 계기를 통해 정신과를 내원하게 되었는데, 그 덕에 어릴 때부터 신경정신과의 문턱이 내게는 낮게 느껴졌던 것 같다.
처음 내원한 것은 지금 생각하면 소발작*에 해당할 것 같은 증상 때문이었다.
*소발작(absence seizure, petit mal)
보통은 소아(10세 이하의) 뇌전증 환자에게서 나타나는 증상이라, 17세의 나에게는 해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소발작의 증상은 보통 다음과 같다.
"정상적으로 행동하던 아이가 갑자기 아무 전조 증상 없이 갑자기 하던 행동을 멈추고 멍하게 앞이나 위를 바라보는 모습을 보이며, 간혹 고개를 푹 수그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발작은 대개 5~10초 이내에 종료되며, 길어도 수십 초를 넘기지 않는 경우가 일반적이라 알아차리기 어렵다. 본인도 자신이 발작을 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발작 직전에 하던 행동이나 상황으로 다시 복귀한다. 간혹 눈꺼풀을 깜박이거나 입맛을 다시거나 씹는 모양, 옷을 만지작거리는 자동증이 동반될 수도 있다(비정형 결신). 소발작은 숨을 크게 몰아쉴 때 나타나기 쉽다."
그러나 소발작이 아니었더라도, 뇌전증의 전조 증상 중에는 "갑자기 지금까지 익숙하던 현실이 낯설게 느껴지거나, 낯선 것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들리거나 보이는 등의 환시나 환청, 불러도 반응이 없으며 무언가 만지려 하거나 입맛을 다시는 등의 이상한 행동" 등이 포함되기에 나 또한 부분적인 뇌전증 증상을 겪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증상은 성인이 되어서도 가위(수면발작)와 함께 동반되어 종종 나타났다.
**만약 소발작을 포함한 뇌전증 증상이 의심될 경우에는, 정신건강의학과가 아니라 신경과를 찾아야 한다!**
공부 스트레스가 한창일 때인 고1, 2 때에, 나는 약간의 기면 증상에 더하여
때로는 자신도 모르게 멍해지면서 유체이탈을 하는 듯한 경험을 종종 하곤 했다.
잠깐 졸린 듯- 하다가 내가 완전히 다른 공간에 와 있는 것 같은 환시, 환청 증상을 겪었는데, 예를 들면
- 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주위를 보니 화장실인 것 같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면 방이라든가,
- 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단소 소리가 들리면서 주위가 음악실로 변하고 친구들이 단소를 불고 있다든가, (그러나 실상은 다시 방)
- 성당에서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갑자기 커다란 바위가 되어 그 위에 십계명이 적혀 있는 것 같다든가(이건 영적 체험으로 봐야 할까)
과 같은 증상들이 종종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것이 현실이고 어느 것이 환각인지 모를 매트릭스 같은 상황이 되어 버려서,
실제로 화장실에 갔을 때에도 여기가 사실은 화장실이 아니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까지 덤으로 오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봉준호 감독과 송강호 배우를 섞어 놓은 인상이었던 원장님은
그런 증상을 재잘재잘 설명하는 고1 어린애를 편안한 눈빛으로 바라봐 주면서
'그럴 수도 있지만 괜찮아'라고 다독여 주거나,
'네가 똑똑해서 가끔 뇌에서 과부하가 걸리는 거다' 라는 식으로 뭔가 치켜세워 주는 말까지 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참 고맙다. 나는 내가 정말 특별해서 그런 줄 알고 자신감까지 얻었으니까.
대학 입시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성인이 되고서는 그런 증상은 한동안 잠잠해졌다.
그리고 정신과를 다닐 일이 앞으로는 없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니었다.